[김이재의 지리적 상상력]위기를 기회로 만든 화교의 생존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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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카 반도 끝 바위투성이 작은 어촌 싱가포르는 영국 식민통치기에 발달한 무역항에 불과했다. 1959년 35세에 자치정부 총리에 오른 케임브리지 법대 출신의 엘리트 화교 리콴유는 대규모 컨테이너 항구를 건설하고 해외투자를 적극 유치해 서울과 비슷한 면적의 도시국가를 세계적인 물류 중심지, 동서양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만들었다. 1965년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탈퇴한 싱가포르는 오일쇼크, 아시아 외환위기, 사스 창궐 등 생존을 위협하는 위기를 오히려 도약의 기회로 삼았고, 정부는 재정 안정·서민주택 보급·공직비리조사국 설치 등의 사회통합정책을 과감하게 밀어붙여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안전한 국가가 되었다.

리콴유는 세계 화상회의를 주도하고 시장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이며 싱가포르를 전 세계 화교 네트워크 및 금융 중심지로 업그레이드시켰다. 꽃과 정원의 도시로도 유명한 싱가포르는 세계 정치·경제 환경의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했고, 마치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것 같은 급격한 변신을 계속해 왔다. 공연장에서 박수를 치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을 규제할 정도로 보수적인 나라였지만 21세기 창의적 인재가 몰려드는 매력적인 창조도시가 되기 위해 성적 소수자에 대한 관용도를 높이고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정책으로 급선회할 정도였다.

낯선 나라에서 흙수저로 고생하며 금수저를 만들어 본 경험이 있는 동남아 화교들은 치열한 글로벌 경제전쟁에서 중국과 자국의 경제가 상생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하는 첨병으로 맹활약 중이다. 화교가 주류인 싱가포르, ‘강력한 연결자(super-connector)’인 홍콩과 더불어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화교 세력은 동남아에 밀집해 있는데, 특히 말레이시아 화교와 중국 본토의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네트워크는 지금도 끈끈하게 유지되고 있다. 샤먼(廈門)대학은 동남아에서 고무사업으로 큰돈을 번 화교 사업가 천자겅(陳嘉庚)이 1921년 자신의 고향인 푸젠(福建)성에 설립한 명문 대학인데, 샤먼대학의 해외 캠퍼스가 중국 국립대학으로는 최초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인근 선수리아(Sunsuria City)에 조성될 정도이다.

얼마 전 말레이시아 화상협회 창립 95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세계경제 콘퍼런스에는 세계 각국을 대표하는 화교 기업인들과 중국 경제의 거물급 지도자들이 총출동했다. 바이두·알리바바·텐센트(샤오미·화웨이) 등 신생기업이 중국의 경제지도를 빠르게 변화시키고 인공지능 로봇, 생명공학 등 첨단 분야의 기술혁명이 가속화되는 시기에 각 분야 세계 최고의 전문가들을 초대해 최신 정치·경제 동향과 정보를 흡수하고 사업의 방향을 설정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1위를 달리던 기업이나 국가도 한 방에 ‘훅’ 가는 냉혹한 세계 경제체제 속에서 기업이 계속 생존하고 번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함께 나누고 화교 기업과 공동체의 생존 전략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한국과 한반도는 뜨거운 감자였다. 실제로 최신 이코노미스트지 표지 모델로 북한 지도자 김정은이 등장할 정도로 북한의 핵위협은 국제정치 분석가뿐 아니라 화교 기업인들에게도 사업의 큰 변수이자 골칫거리가 되고 있었다.

한편 최근 동남아에서 한국 드라마, 연예인의 인기가 상승하면서 한국 제품과 문화산업, 창의적인 한국 인재에 대한 동남아 화교 기업인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하지만 홍콩 출신 화교 기업가 조너선(Jonathan Choi) 회장이 대한민국 명예홍보대사로 활약하고 있었을 뿐, 화교들의 세계에 뛰어들어 사업 기회를 포착하려는 토종 한국인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제는 우리도 정부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 주기를 기대하거나 깨끗하게 단장된 국내의 창조경제혁신센터 건물에 앉아 한국을 찾아오는 외국인을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보다는 경제가 꿈틀거리며 변화하는 현장으로 달려가는 적극성을 기르면 어떨까? 특히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신하고 과감하게 이동해 새로운 사업의 틈새를 파고드는 동남아 화교의 유연성을 배우고 위기를 ‘대박의 기회’로 바꾸는 그들의 특별한 생존 전략을 전수받아야 하지 않을까?

 

※ 출처 ※  

김이재 문화지리학자 경인교대 교수, [김이재의 지리적 상상력]위기를 기회로 만든 화교의 생존전략, 경향신문, 2016-06-01